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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인간

모든 인간은 고통을 당하며 그 고통에서 벗어 나고자 한다.신체적 고통을 줄여주는

의사와 종교인들은 신앙의 힘으로 마음의 아픔을 줄이는데 도움을 준다.

저자는 철학이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위로 뿐 아니라 고통의 다양한 모습과 의의를

철학적 안목에서 관찰하고 경험에 입각하여 고통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신체적인 고통(pain)과 정신적인 "괴로움" (苦)이 있다.

어떤 고통은 너무 심하여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있고 극심한 신체적 고통은

마취제가 고통을 들어주며 고통으로 안락사 문제도 제기된다.고통 당하는 욥은

그가 태어 났음을  원망한다(욥기 3:11 --16)

동서양 모든 문화에서 잘못에 대한 벌(罸)로 고통이 가해 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은 도덕적 공정성을 무시하며 역사적으로도 악행을 저지른 나치의

독일과 일본이 번성한다.악한 사람이 번성하고 선한 사람이 고통 당하는 것에

대한 불평은 모든 시대나 지역에 관계없이 있었다.(시편 73:12 - 13)

 

 

고통은 우연적이며 이유도 목적도 의미도 없다는 고대 그리스와 니체 철학의

허무주의가 있다.주어지는 고통을 운명적이므로 즐거이 당하라는 것이며 체념

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다는 것이다.

"더 큰 선을 가져 오기 위하여 전능하신 신이 악을 허락했다."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辯神論theodicy)은 하나님의 아들의 成肉身은 원죄를 소멸하는 큰 이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헤겔은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변신론을 비판하고 변증법의"正 反 合"이란 형식의

논리로서 주어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병이 건강을.

배고픔이 배 부름을. 그리고 피곤함이 쉼을 즐겁고 좋은 것을 만든다."라고

고대 그리스 변증법적 철학자가 주장하였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고통은 전체 역사 발전이란 관점에서 개인의 고통 당하는

것에 머무를수 없어며 개인의 고통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역사 안에서

찾을수 없다.

플라톤과 칸트의 영혼 불멸설은 선과 악은 이세상에서 보상이나 보응을 받지

못하므로 네세가 있어 인과응보의 법칙을 확고히하고 도덕적 타락을 막고자했다.

고통에 대한 철학적인 여러 관점들을 보았으나 모든 철학이 개인의 고통에 대하여

진정한 의미있는 말을 할수가 없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고통이란 제거되지 않으며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어야 하며

에너지 불변의 법칙 처럼 지역,계층 ,문화별 높 낮이가 다를 뿐 전체가 일정한

고통불변의 법칙으로 존재한다.환상적이고 이론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변신론을

유지함이 인류의 정신 건강 유지와 소망을 가질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에서 해방될수 없어므로 철학의 임무는 이론적 관점에서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며 고통의 삶에서 영원한 구원을 제공하는 것이 종교라면 고통의 현실적

이고 구체적인 체험으로 취급한다.

붓다는 인생의 四苦(生 老 病 死)를 보고 충격받았으며 .감각을 가진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고통이란 사실에서 수행의 출발점이 되는 현실 인식이였다.

삶이 고통이란 것에서 출발한 불교가 해탈로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고 보살의

정신으로 다른이와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 해탈의 과정에서 욕망의 절재는 사회

모든 갈등을 약화 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종교가 고통을 벗기 위한 허구라는

주장의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보다 불교가 훨신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줄였다.

 

기독교는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인간의 자유가 죄를 택하여 인간 삶에

침입했다. 고통은 그에 대한 벌(罰)이다.불교처럼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선택이다. 악한 자가 번성하고 자손이 잘되며 의로운 자가

핍박과 고난을 받아야하나 라고 항의한다.(시편 73편) 이 문제는 내세에 하나님의

공정한 최후심판의 교리로 답한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신앙을 굳건히

하고 강하게 훈련하기 위함이다(벧전 1:7) 실로암에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것과 날 때부터 소경은 자신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다 라고 예수는 가르친다.

다른 사람의 죄의 피해로 고통 당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그 사실은 기독교

윤리관과 사회관의 핵심을 이룬다.고통으로 이루어 지는 벌은 받는 것이 정의며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지고 벌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 시키며 인류는 그 공적으로 구원 받으므로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가 된다. 죄의 결과가 벌이지만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하여 사랑인 것이다.,

성도들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적 사회관이며 윤리인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구조의 결과로 약자들에게 고통이 오면 형평의 회복보다도

기독교적 노력은 약자의 상징인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싯달타도 자신의 해탈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행했다.예수의 고난도 자발적으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희생으로서 고통이며 인류 사랑의 가장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인간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관점은 일리는 있어나 고통 극복을 위한 종교는 단순한 환상과 이론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는 엄청난 일을 했다.그들은 이론적으로 고통을 해결 못할 뿐 아니라

종교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 끝 -------

 

2018. 4. 9 읽은 후              "고통 받는 인간"  저자 손 봉 호

                                   (고통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  서울대출판문화원